뉴턴의 모교 케임브리지대에서 1시간 반가량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가면 인구 약 3만4000명의 작은 도시 링컨셔카운티 그랜섬에 도착한다. 뉴턴은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전 총리가 태어난 곳이기도 한 이곳의 ‘킹스스쿨’에 다닐 때 자연현상 뒤에 숨은 원리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됐다. 뉴턴의 생가는 그랜섬에서도 11km가량 더 들어간 마을 울소프에 있다.
그의 집은 뉴턴 사망 후 팔려 300여 년간 집주인이 여럿 바뀌었지만 크게 변형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됐다. 1942년 영국왕립학회가 사들여 시민환경운동 단체 ‘내셔널 트러스트(NT)’에 기증해 ‘울소프 매너(manor·대저택이라는 뜻)’로 이름 붙여져 관리되고 있다. 개인 박물관과 함께 간단한 과학 실험실도 갖춰져 교육 장소로도 쓰인다. 1주일에 200명가량 학생과 관람객이 찾는다고 관리 직원 존 월터스 씨(60)는 소개했다.
이곳에는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을 생각하게 됐다고 알려져 있는 그 유명한 ‘뉴턴의 사과나무’가 있다. 뉴턴이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사과나무는 1820년 베어지고 다시 심어진 것이다. 관광객들이 제일 먼저 찾는 집 왼쪽 작은 사과나무 앞에는 ‘사과나무를 보고 뉴턴이 태어난 집에서 영감을 얻으세요!’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생가 안내서에 따르면 ‘뉴턴의 사과’는 친구 윌리엄 스튜클리 씨가 뉴턴에게 전해들은 것으로 뉴턴 본인이 직접 말한 적은 없어 뉴턴이 정말 사과나무에서 영감을 얻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뉴턴의 생가는 겉보기에는 평범한 양목장 중농의 집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물체의 운동과 만유인력, 미적분 그리고 주요 광학 원리 등 수학과 천문학, 과학사를 새로 쓰는 아이디어가 탄생하고 중요한 실험이 이뤄졌다. 케임브리지 트리니티칼리지에 다니던 뉴턴은 1665년 런던과 케임브리지 등을 덮친 흑사병으로 대학이 휴교에 들어가자 이곳 울소프로 돌아온다. 중요한 발견과 발명은 이때 이뤄졌다고 동행한 이만근 교수(동양대)는 설명했다. 뉴턴도 “당시가 나의 발명의 최대 절정기였다”고 밝혔다.
뉴턴의 생가는 겉보기에는 평범한 양목장 중농의 집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물체의 운동과 만유인력, 미적분 그리고 주요 광학 원리 등 수학과 천문학, 과학사를 새로 쓰는 아이디어가 탄생하고 중요한 실험이 이뤄졌다. 케임브리지 트리니티칼리지에 다니던 뉴턴은 1665년 런던과 케임브리지 등을 덮친 흑사병으로 대학이 휴교에 들어가자 이곳 울소프로 돌아온다. 중요한 발견과 발명은 이때 이뤄졌다고 동행한 이만근 교수(동양대)는 설명했다. 뉴턴도 “당시가 나의 발명의 최대 절정기였다”고 밝혔다.
영국 링컨셔카운티 울소프에 있는 아이작 뉴턴의 생가 ‘울소프 매너’. 영국왕립학회가 민간에서 사들인 후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증해 문화유산으로 관리하고 있다.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에 대한 착상을 얻었다고 전해지는 사과나무도 왼쪽 정원에 한 그루 심어져 있다.
한편 독일의 철학자 법학자이면서 수학자이기도 한 라이프니츠는 미적분과 함께 현대 대표 문명 기기인 컴퓨터가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0과 1’의 이분법을 개발했다. 라이프니츠는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고 자라 라이프치히대에서 철학 및 법학 석·박사 학위를 받은 후 파리에서 외교관 등을 지냈다. 30세에 요한 프리드리히 공(公)의 궁중 고문관으로 초청받아 하노버에 온 그는 남은 40년 생애를 하노버에서 보내 하노버가 그의 ‘학문의 고향’이 됐다. 하노버 시는 하노버대 개교 175년을 맞은 2007년 대학 이름을 라이프니츠대로 바꾸는 등 라이프니츠의 재평가 작업에 적극 나섰다. 대학 심벌도 이진법을 표기한 라이프니츠의 친필 글씨를 따다 썼다. 대학 1층에는 그가 개발한 초기 사칙연산 계산기와 미적분 공식 기호, 철학과 법학의 성과 소개 등 특별 전시 공간을 마련했다. 시 중심 공원에는 ‘이분법’을 형상화한 조각도 설치했다. 조각상에는 ‘다양함 속의 통일’ 한마디가 새겨졌다. 시청의 회의실 이름은 ‘라이프니츠룸’이다.
라이프니츠대로 이름을 바꾸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클라우스 훌레크 부총장은 “라이프니츠에게 ‘0’은 무(無), ‘1’은 하느님 말씀이었으며 0과 1의 이진법에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뉴턴의 ‘유분법(fluxions·미분)’과 유분법의 역(逆·적분법) 그리고 라이프니츠의 미적분 개념은 같다. 다만 현재 전 세계에서 쓰이는 미적분 기호는 대부분 라이프니츠가 개발한 것이어서 미적분의 대중화는 전적으로 라이프니츠 덕분이다.
미적분은 사물의 운동과 변화를 관찰 측정 예측하는 도구를 인류에게 제공했다. 행성 운동, 비행 및 물체의 낙하, 기계 작동과 유체 흐름, 기체의 팽창, 나아가 전기력과 자기력의 활동, 전염병의 확산, 내일의 날씨 예측에서부터 주식시장 분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밑바탕은 미적분을 통해서만 풀이가 가능한 다양한 지수 함수와 로그함수가 바탕에 깔려 있다. 산업혁명과 20세기 후반의 인공위성이나 유인 우주선 발사 등도 미적분이라는 핵심 기법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수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미적분 이전의 모든 기하 및 대수학은 기본적으로 고정된 물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반면 미적분은 등속이나 등가속 등 최소한의 규칙성이나 일정한 패턴을 나타내는 것이면 고체 액체 기체를 가리지 않고 운동과 변화를 파악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미적분학 발명은 바퀴나 활자 인쇄의 발명만큼 극적이고 혁명적인 효과를 가져왔으며 그야말로 중력 등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한 것이다’(책 ‘수학의 언어’)는 평가도 나왔다.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자연의 커다란 책은 그 책에 쓰여 있는 언어를 아는 사람만이 읽을 수 있다. 그 언어는 수학”이라고 했다. 케임브리지대에서 만난 이 대학 수학과 과장 피터 헤인즈 교수는 “미적분이야말로 자연을 읽는 언어”라고 말했다.
뉴턴은 생전에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멀리 앞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를 딛고 서 있기 때문”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뉴턴 이후의 과학과 인류 역사는 뉴턴이라는 큰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 한 단계 새로 도약하게 됐다.(책 ‘아무도 풀지 못한 문제’)
▼ 라이프니츠 ‘미적분’ 발표에 뉴턴 “내것 도둑질” 격노 ▼
“내가 창시자” 말년까지 공방… 후대 학계 “표절 아니다” 결론
아이작 뉴턴은 아버지가 내전에 참여했다 전사해 유복자이자 미숙아로 태어났다. 또 이름도 쓰지 못하는 농부의 아들이었으나 후에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과학자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영국왕립학회 회장까지 올랐으며 런던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라이프치히대 철학과 교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 서재에 파묻혀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0대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 등 신동이었다. 하지만 죽을 때는 하인 한 명만이 장례식에 참가할 정도로 쓸쓸한 생을 마쳤으며 실제 무덤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렇게 대조적인 삶을 산 두 과학자는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으며 영국왕립학회 회원으로 학문적 교류도 했다. 하지만 미적분을 누가 먼저 발견했는지를 놓고 수십 년간 치열한 표절 공방을 벌였다. 사건의 발단은 런던의 출판업자 존 콜린스가 뉴턴의 미출간 자료 일부를 라이프니츠에게 보내준 데서 빚어졌다. 뉴턴은 콜린스의 ‘배신행위’로 자신의 미적분 아이디어가 누출됐다고 주장했다. 뉴턴이 “라이프니츠가 내가 이미 발명한 미적분을 도둑질했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한 반면 라이프니츠는 “비슷한 시기에 독자적으로 개발했을 뿐”이라고 비교적 점잖게 응수했다. 영국과 대륙의 과학자들까지 가세해 서로 편을 갈라 두 사람을 응원하며 한동안 교류를 중단했을 정도다.
뉴턴은 라이프니츠가 말년에 질병과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불우한 시절을 보내며 방어할 만한 여력이 없을 때에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영국의 전기 작가 마이클 화이트 씨는 최근 저서 ‘마지막 연금술사, 아이작 뉴턴’에서 “뉴턴은 세계를 주재하는 신의 뜻을 해석하는 ‘그리스도와 같은 과학자’는 단 한 명밖에 없으며 그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믿었다”며 “이러한 생각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은 철저하게 공격했으며 때론 거짓과 위선도 서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만근 교수는 “후대 수학계는 콜린스가 넘겨준 미적분 자료를 보기 전에 라이프니츠도 미적분을 독자적으로 발명한 것으로 결정짓고 ‘무승부’ 판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