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5일 수요일

쾨니히스베르크 의 다리


단번에 풀어낸 ‘연결망 공식’… 컴퓨터 회로의 기초가 되다
스위스 바젤대의 한 부속 건물 입구 좌우 양쪽에 베르누이 가문이 배출한 야코프, 요한, 다니엘 등 3명의 수학자와 오일러의 흉상이 걸려 있다
“마치 사람이 숨을 쉬는 것처럼, 또 독수리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무슨 문제든) 아무 힘을 들이지 않고 계산을 해냈다.”

프랑스의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 프랑수아 아라고(1786∼1853)가 자신보다 한 세대 전의 스위스 천재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1707∼1783)에 대해 한 말이다.

지난달 그가 여생을 보낸 스위스 바젤을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오일러가 남긴 흔적은 많지 않았다. 바젤의 유일한 대학인 바젤대 건물 안에 생전에 그와 인연이 많았던 3명의 베르누이가(家)의 수학자들과 함께 흉상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바젤에서 전철로 20여 분 떨어진 리헨 시에 오일러의 아버지가 목사를 지낸 교회가 있다고 해서 찾아가 보았다. 리헨 시 정부가 1960년 오일러의 동판 얼굴을 설치해 놓은 게 눈에 띄었다. 동판에는 ‘수학자 물리학자 엔지니어 천문학자 그리고 철학자, 그는 어린 시절을 리헨에서 보냈다. 그는 석학이자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라고만 새겨져 있었다.
수학자들은 아르키메데스, 아이작 뉴턴,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를 ‘역사상 3대 수학자’라고 하는데 여기에 한 명을 추가한다면 바로 오일러다.

생전에 그가 보여준 경이로운 기억력과 능력, 열정을 보여주는 일화는 끝이 없다. 예를 들어 잠이 오지 않는 날에는 1부터 시작해서 100까지 각 수의 6제곱수를 하나하나 암산해 세어나가다 그것이 끝나면 각 수의 6제곱수를 처음부터 모두 더하는 계산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는 것이다. 기억력도 뛰어나 세 권이나 되는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몽땅 암송했을 정도였다고 한다.(책 ‘앵무새의 정리 3, 소설로 읽는 수학의 역사’)

그는 또 동료 수학자들이 몇 주일에 걸쳐 끙끙댄 프랑스과학원이 낸 수학 문제를 3일 만에 풀다 오른쪽 눈을 실명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초상화는 왼쪽 얼굴 부분만을 강조해 보여주는 것이 많다. 하지만 수년 후 왼쪽 눈도 백내장과 전염병으로 실명했다. 그는 실명 상태로 28년을 살았다.

얼마나 그가 천재였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는 또 있다. 러시아 예카테리나 1세 여왕의 초청으로 고향 바젤을 떠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 활동하던 1771년, 고향 마을에 대화재가 나서 서재에 있는 자료들이 모두 불타 버렸다. 하지만 자료가 모두 없어졌는데도 더 많은 연구가 이뤄졌다. 이는 그의 자료가 모두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옛 프로이센의 수도이자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고향이기도 한 쾨니히스베르크(제2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 칼리닌그라드로 바뀜) 주민들이 그를 찾아와 “쾨니히스베르크에는 프레골랴 강이 흐르는데 이 강에 작은 섬이 하나 있다. 이 섬 주변에 7개의 다리를 놓았는데 이 다리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거치는 방법이 있을까”라고 물었다. 오일러는 문제를 보자마자 “불가능하다”는 답을 내렸다.

이것은 현재로 치면 ‘한 붓 그리기 원리’다. 오일러는 질문을 받자마자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7개의 다리와 강의 연결을 계산해내면서 붓을 떼지 않고 모든 선을 한 번만 지나는 조건을 계산한 후 “불가능”이란 답을 내렸다. ‘한 붓 그리기 원리’는 ‘도형으로 그렸을 때 홀수점이 하나도 없거나 두 개만 있어야’한다. (책 ‘수학의 유혹’)

오일러가 발견한 ‘한 붓 그리기 원리’는 ‘연결망에 대한 오일러의 공식’으로 발전해 도시에서 경찰이나 방범대원이 정해진 구역을 모두 거치면서 중복되지 않게 하는 효율적인 순찰 경로 같은 것을 계산해내는 것에서부터 현대 통신망 분석과 컴퓨터 회로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 필수적으로 응용되고 있다. 인접국이 같은 색이 되지 않게 하면서 세계 지도상의 각국을 4가지 색깔만으로 칠할 수 있는 이른바 ‘4색 지도 이론’도 이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그가 창안한 수많은 수학 기호와 정리는 현존하는 누구도 필적하지 못할 것이라는 데 학계의 이견이 없다. 원주율(π)도 그가 쓰면서 일반화했으며 ‘삼각형의 외접원에 관한 오일러 관계’ ‘4차 방정식의 해법에 관한 오일러 방법’ ‘연결 그래프에 관한 오일러 정리’ ‘오일러 함수’ ‘복소수의 사인과 코탄젠트에서 오일러 변화값’ 등등 오일러의 이름이 들어간 수학의 각종 원리나 방정식은 셀 수 없이 많다.

오일러는 자신이 만든 수많은 방정식 중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오일러의 방정식’(e,- + 1 =0, e=2.71281828…, e는 소수점 이하 무한대로 아무 규칙 없이 계속되는 무한수)을 가장 좋아했다. ‘지수로그의 밑인 e’의 수치는 야코프 베르누이가 계산한 것이지만 기호 ‘e’를 창안하고 이를 i(i =.)와 π 등과 엮어 하나의 방정식으로 만든 것은 오일러다. 이만근 교수(동양대)는 “이 식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모든 공학에서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날에도 오전에는 팽창하는 풍선의 팽창 속도를 계산했으며, 오후에는 새로 발견된 행성인 천왕성의 궤도를 계산하는 데 몰두했다. 저녁 식사 후 손자를 보며 잠시 쉬다가 갑자기 심장마비가 오자 석판에 “나는 죽는다”고 쓰고 생을 마감했다.(책 ‘아무도 풀지 못한 문제’)



▼ 아들 다니엘의 ‘유체 역학’ 연구 가로챈 아버지 요한 ▼
이만근 교수는 “바젤에서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베르누이가(家)가 있는데 후대는 이 집안을 ‘신비의 베르누이가’라고 부를 정도로 3대에 걸쳐 8명의 걸출한 수학자를 배출했다.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과학자 집안”이라고 소개했다. 이 가문에서 배출된 야코프(1654∼1705) 요한(1667∼1748) 형제와 요한의 차남 다니엘(1700∼1782)은 학문적 인간적으로 오일러와도 인연이 깊다.

야코프는 작은 표본으로 큰 집단에 대한 통계를 추론하는 ‘통계 추론’이나 확률론에서 ‘큰 수의 법칙’ 발전에 기여했다. 또 다니엘이 발견한 비행기 원리인 ‘베르누이 방정식’은 뉴턴의 미적분 기법을 기체와 액체의 운동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으로 현대 항공 산업의 수학적 기초를 제공했다. 요한은 통계학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해 특히 확률에서 객관적인 기댓값 외에 주관적인 효용이나 인간적인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는 ‘베르누이의 효용법칙’을 개발했다.

야코프 요한 형제는 아버지로부터 ‘가난하게 사는’ 수학자의 길을 가지 말라고 강요를 당하면서도 몰래 숨어서 공부하고 끝내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수학자의 거목이 됐다. 요한의 차남 다니엘도 유명한 수학자가 됐다.

두 사람은 형제이자 ‘학문적 동지’였지만 나중에는 서로 질시하고 적대시하는 관계로 변했다. 형 야코프는 나중에 동생이 자신보다 더 좋은 연구결과를 내 유명해지려고 하자 자신은 바젤대 교수였으면서도 동생이 교수직을 얻는 것을 견제했다. 야코프가 결핵으로 죽자 동생 요한이 “이제야 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둘의 관계는 악화됐다. 요한은 또 차남 다니엘이 연구해 놓은 ‘유체 역학’에 대한 내용을 가로채 자신의 논문으로 발표해 이를 나중에 알아챈 아들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요한은 또 라이프니츠가 영국의 아이작 뉴턴과 미적분을 누가 먼저 발명했는지를 놓고 공방을 벌일 때 라이프니츠 옹호자로 대표적인 ‘뉴턴 저격수’가 됐다. 반면 뉴턴을 흠모했던 아들 다니엘은 뉴턴 편을 들어 아버지의 미움을 샀다.

질투심 많은 성격으로 형, 아들과 불화를 빚은 요한이지만 오일러에 대해서만큼은 달랐다. 요한은 오일러의 수학적 천재성을 알아보고 제자로 삼는다. 또 오일러가 신학자가 되기를 바랐던 오일러의 부친을 직접 설득해 오일러가 수학자의 길을 가게 한 것도 요한이었다. 오일러보다 7세 많은 요한의 아들 다니엘도 오일러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서 연구할 당시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다니엘의 아들 야코프 2세는 오일러의 손녀와 결혼해 사돈 지간이 되기도 했다.

야코프와 요한이 교수로 있었던 바젤대 수학과는 18세기에 독일의 괴팅겐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유명한 수학 명문이다. 이 대학 수학과 한스 크리스토프 임호프 교수(68)는 연구실에 야코프의 사진을 걸어놓고 있었다. 그는 “요한 등 베르누이가의 수학자들이 터널을 뚫는 사람들이었다면 오일러는 뚫린 터널에 고속도로를 놓은 사람”이라고 비유했다.

베르누이가는 ‘역사상 진귀한 수학자 가문’이었다는 평가가 무색할 정도로 바젤에 흔적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 일가가 살았던 4층짜리 집과 바젤 시내에 ‘베르누이가’라고 이름 붙은 거리만 남아있을 뿐이다. 4층짜리 집은 모두 다른 사람 소유였으며 1층은 서점으로 변해 있었다. 집 출입문 오른쪽에 ‘베르누이 일가가 살았다’는 표지판만 작게 붙어 있을 뿐이었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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