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의 6분의 1은 소년으로, 12분의 1은 청년으로 살다 인생의 7분의 1을 혼자 살았다. 결혼해 5년 후 아들을 낳았고, 아들이 내 생애 2분의 1을 살다 죽은 후 (내가) 4년을 더 살고 일생을 마쳤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그리스 수학자 디오판토스(추정 생몰연도 246∼330)의 묘비 문구다. 디오판토스는 수학사에서 정수론의 창시자로 불린다.
이탈리아 레오나르도 피보나치(1170∼1250)는 ‘주산서(리베르 아바치)’란 책을 통해 인도에서 개발된 ‘힌두 아라비아숫자’를 유럽에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로마숫자 사용이 보편화된 유럽에서 홀대를 받던 아라비아숫자의 장점을 발견하고 이를 적극 알려 인류 역사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가 발견한 ‘피보나치 수열’은 자연 속에 숨어 있는 수의 신비를 드러내 피보나치를 수학의 암흑기인 중세 유럽에 독보적인 수학자로 자림매김시켰다.
‘피보나치 수열’은 1에서 시작해 선행하는 두 수를 더한 값을 다음 수로 놓는 것이다.
이는 1, 1, 2, 3, 5, 8, 13, 21, 34, 55, 89, 144, 233… 등으로 이어진다(두 번째 수 ‘1’은 선행수가 하나여서 예외적으로 첫 수를 반복해서 쓴 것이다). 그런데 이 수열은 자연 속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꽃잎의 수가 3(백합) 5(미나리아재비) 8(참제비고깔) 13(금잔화) 21(애스터) 34(데이지) 등이다(책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피보나치수열 앞뒤 수의 비율은 ‘황금비율’인 (-1 + 5)/2 즉, 1.618에 수렴해간다. 미국에는 ‘피보나치 협회’가 결성돼 지금도 자연 중에서 발견되는 피보나치 수열을 찾고 제보도 받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수학에서도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데카르트는 어느 날 누워서 천장에서 파리가 옮겨 다니는 것을 보고 X, Y 좌표를 구상하게 됐다고 한다. 데카르트 이후 수학에서 정수론과 기하학이 본격적으로 융합되기 시작한다. 방정식을 그래프를 그려서 푸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프랑스의 소피 제르맹(1776∼1831)은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수학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 은행가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학에 대한 집념을 불살랐던 그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푸는 중간 과정에서 큰 기여를 했다. 도형 문제를 푸는 데 열중하다 로마 병사에게 피살된 아르키메데스의 일화에 감동받아 수학에 빠져들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또 당대 최고 수학자였던 독일의 카를 가우스(1777∼1855)와 교류하기 위해 남자 필명으로 편지를 주고받은 일화도 널리 전해진다. 이런 열정을 가진 인물이다 보니 후학 양성에 인색했던 가우스조차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제르맹은 가우스의 학문적 은혜를 잊지 않고 독불(獨佛) 전쟁 중 자신의 프랑스 군부 인맥을 통해 프랑스군에 점령당한 지역에 있던 가우스의 안전을 챙겨주었다고 한다.
인도 출신 천재 수학자 스리니바사 라마누잔(1887∼1920)은 영국 케임브리지대에 와서 연구하던 시절인 1918년 수학 문제가 잘 풀리지 않는 것을 비관해 런던 지하철에 몸을 던졌으나 지하철이 극적으로 정차해 목숨을 건질 만큼 학문에 대한 집념이 강했다고 시리즈에 동행했던 이만근 교수(동양대)는 말했다.
헝가리의 수학자 에르되시 팔(1913∼1996)은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찾아서 각국을 다녔던 ‘떠돌이 수학자’였다. ‘수학 연구에 구속이 된다’며 평생 독신으로 집, 아내, 아이, 직업, 취미가 없이 살았던 그는 생전에 작은 가방에 노트 몇 권만 넣어가지고 다닐 정도로 소박한 삶을 살았다. 항상 ‘나의 두뇌는 열려 있다’며 수학자들을 불쑥불쑥 찾아가 어려운 문제를 함께 푸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일생을 살았다.
城처럼 웅장한 英 케임브리지대 수학과 건물 영국 케임브리지대 수학과 건물이 마치 성처럼 펼쳐져 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이 졸업하고 교수를 지낸 곳이자 천재 수학자 겸 천체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현직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호킹 교수 한 사람을 배려해 수학과의 모든 문을 버튼 하나로 열고 닫을 수 있도록 설계했다. 케임브리지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주인공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존 내시(1928∼ )는 미 프린스턴대 교수로 199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어린 가우스’라고도 불릴 정도로 수학 문제 푸는 속도가 빨랐던 인물이었으나 한때 정신분열증에 걸려 30세에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내시처럼 수학에 몰두하다 ‘정신적 문제’가 나타난 사람은 여럿이다. 정수나 소수 분수를 가리지 않고 무한히 계속되는 이른바 ‘무한수’에 대한 많은 통찰력을 제시했던 독일 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1845∼1918)는 말년에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심장마비로 생을 마쳤다. 영국의 저명한 철학자 논리학자이자 수학자였던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종종 자신의 연구 결과가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꿈을 꾸기도 할 정도로 강박관념을 갖기도 했으며 심할 때는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고 한다.
수학은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명사들이 아름다운 학문으로 칭송한 바 있다. 지동설로 유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는 “자연의 커다란 책은 그 책에 쓰여 있는 언어를 아는 사람만이 읽을 수 있다. 그 언어는 수학이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영국의 철학자 러셀은 “수학은 조각의 아름다움과 비슷하다. 차갑지만 간결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고 했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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