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일 토요일

가우스 ‘실수+허수’ 개발로 현대수학의 門 열어…3대 수학자 반열에







“나는 말을 할 수 있기 전부터 이미 계산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 영국의 아이작 뉴턴과 함께 ‘역사상 3대 수학자’라고 꼽히는 독일의 카를 가우스(1777∼1855). 그가 어릴 때 보여준 ‘수학 신동’ 일화는 세 살 때부터 시작한다. 벽돌공장에서 근로자들을 관리하던 아버지가 근로자들의 임금 명세를 보며 계산을 하고 있었는데 어린 가우스가 보다가 틀린 곳을 지적했다고 전한다. 이어 초등학교 시절엔 나중에 ‘가우스식 계산’이라고 이름 붙어 유명해진 자연수의 덧셈을 해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벌로 “1부터 100까지 더하라”는 문제를 냈는데 가우스가 불과 몇 초 만에 칠판에 ‘5,050’을 적어 놓고 유유히 밖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정답임을 확인하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어떻게 이렇게 빨리 계산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1에서 100을 차례대로 늘어놓은 뒤 다음 줄에서는 역순으로 늘어놓고 위아래 수를 암산으로 더했다.

이만근 교수(동양대)와 함께 찾아간 가우스의 학문적 고향 독일 괴팅겐 시 곳곳에는 과거 ‘괴팅겐의 거인’으로 불렸던 가우스가 수학·천문·물리학자 및 최초의 전자석 전신기 발명자 등으로 활동했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시내 ‘가우스 거리’ 부근 괴팅겐대 천문대와 부속 건물은 가우스가 별과 행성을 관찰하고 연구했던 곳으로 지금은 가우스 기념관과 세미나실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1801년 이탈리아 천문학자 주세페 피아치가 ‘세레스’라는 작은 행성을 발견했는데 가우스는 이 행성이 1년 뒤 어느 자리에 나타날지를 정확히 예측했다. 행성 궤도를 계산했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천체 연구 대가였던 피에르 라플라스(1749∼1827)는 가우스를 ‘세계 최고 수학자’라고 칭송했다. 이곳 천문대에서 40년 가까이 연구원 등으로 근무하다 퇴직했다는 악셀 비트만 씨(68)는 “가우스는 행성 궤도 계산으로 30세 때인 1807년 괴팅겐대 천문학과 교수 겸 천문대장에 임명되었고 평생 자리를 유지해 수학자보다는 천문학자로서 업적이 크다”고 강조했다.

기념관 입구에는 동료인 빌헬름 베버 교수(물리학과)와 함께 처음 발명해 사용했던 전자석 전신기도 설치되어 있다. 안내문에는 ‘1833년 처음 전신기가 설치되었던 자리이다. (방문객은) 집에 전화해 당시 얼마나 어렵게 첫 통신이 이뤄졌는지 설명해 주라’고 적혀 있다. 당시 가우스는 몇 km 떨어진 곳에 전기신호로 알파벳을 보내 통신을 했다. 시내에는 가우스와 베버의 2인 동상이 세워져 있다. 가우스의 전자기학에 대한 공헌을 인정해 지금도 자기유도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가우스(G)’가 사용되고 있다.

가우스는 어느 날 자와 컴퍼스만을 이용한 17각형 작도법을 발견하고 너무 기쁜 나머지 자신의 묘비에 17각형 작도법을 새겨 달라는 말을 남겼다. 아르키메데스가 묘비에 원통과 내접하는 구의 모양을 새겨 달라고 한 것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묘비를 제작하는 석공이 “능력이 안 된다”며 새기지 못했다. 괴팅겐 시의 한 교회 부속 ‘알바니프리드호프 공동묘지’에 찾아가 보니 묘비에 17각형 작도법은 보이지 않았다.

괴팅겐에서 기차로 1시간가량 떨어진 출생지 브라운슈바이크 시에는 동상만 세워져 있을 뿐 과거 그의 생가 주소인 ‘빌힐름가 30번지’조차 찾을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도시의 90% 이상이 파괴되어 주소도 없어졌다고 한다.

가우스는 “수학은 과학의 여왕이고, 정수론은 수학의 여왕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수학과 정수론에 대한 그의 굳은 신념을 보여준다.

그가 남긴 ‘대수학의 기본 정리’, 즉 ‘1차 방정식은 해(解)가 하나, n차 방정식은 해가 n개이며 이런 해를 구할 때 복소수(실수와 허수의 합으로 이뤄지는 수)까지만 알면 되며 더 이상의 수는 필요 없다’는 것은 수학자들에게는 더 중요한 명제를 찾기 어려울 정도라고 이만근 교수는 말했다.

가우스가 개발한 실수와 허수의 합으로 이뤄지는 수인 복소수(複素數)는 현대 공학에서 필수적이다. x축은 실수축, y축은 허수축으로 평면 좌표 위에 표시하는 ‘복소 평면’의 개발은 수학이 근대 수학에서 현대 수학으로 가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가우스의 정수론을 정리한 것으로 24세 때인 1801년 출판된 ‘산술학 논의’는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수학 책’ 중 하나로 꼽히며 당시 많은 수학자가 그 깊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가우스는 생전에 치장도 별로 하지 않고 소탈하게 살았으며 자신을 잘 드러내지도 않았다고 한다. 연구논문도 많이 쓰는 것보다 ‘양은 적지만 성숙하게(Pauca sed matura)’를 모토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후배나 동료들이 연구 업적을 발표하면 ‘내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라고 우기고 후배들을 격려하기보다는 깔아뭉개는 경우가 많아 후배 양성에는 인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자로는 드물게 일종의 팬클럽 비슷한 가우스협회가 1962년 만들어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002년부터 7년가량 협회장을 맡았던 새뮤얼 제임스 패터슨 전 괴팅겐대 교수(68)는 “가우스는 시대적 변혁기에 산 사람답게 많은 혁명적인 업적을 남겼다”고 말했다. 패터슨 씨에 따르면 협회에는 독일 전역에서 대학교수와 중고교 교사, 수학 과학 담당 언론인 등 200여 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외국인 학자도 있다. 패터슨 씨도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출신으로 괴팅겐대 등 독일에서 30년간 교수직을 지내다 협회 회장까지 맡았다. 매년 1회 기념 저널을 출판한다.

과거 10마르크 독일 지폐의 인물로도 선정됐던 가우스는 사망 후 하노버왕 조지 5세가 그에게 ‘수학의 왕자에게’라고 새긴 지름 70mm 메달을 증정해 ‘수학의 왕자’라는 별명도 붙었다.

▼가우스, 非유클리드기하학 연구체계 정립▼

“우리가 사는 현실에선 ‘삼각형 내각의 합=180도’ 아니다”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 이렇게만 알고 있다면 이미 200여 년 전 기하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를 전후한 시대에 이뤄진 가장 큰 수학사상의 변혁은 2000년 이상 ‘기하학의 절대 명제’로 군림해온 유클리드 기하학을 대체하는 이른바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의 시대가 열렸다는 점이다.

‘평행하는 직선은 만나지 않는다’→‘아니다 만난다’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다’→‘아니다 180도보다 크거나 작다’ 등이 대표적인 ‘비유클리드 명제’들이다. ‘비유클리드 수학자’들에게 있어서 유클리드의 명제는 순수 공간에서의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반면 우리가 실제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다르다는 것이다.

지구 위에서 임의의 평행한 두 직선은 짧은 거리에서는 평행하지만 위도를 거슬러 올라가면 북극과 남극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삼각형도 구(球) 형태의 지구 표면 위에 그리면 평평하지 않고 불룩한 모양이 되며 내각의 합은 180도 이상이 된다(독일의 베른하르트 리만 등이 내놓은 ‘구면 기하학’설). ‘현실 속의 기하학’인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18세기 초 이탈리아의 제로니모 사케리에 의해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이후 가우스와 러시아의 수학자 니콜라이 로바쳅스키 그리고 리만 등을 거치면서 체계를 잡았다고 이만근 교수는 말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탄생은 단순히 도형에 대한 인식의 전환에 그치지 않고 우주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바꿨다. 멀리는 20세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과 같은 새로운 우주관을 개척하는 단초를 마련했다. 가우스가 살았던 시대는 서구에서 ‘혁명의 시대’였다. 그가 태어나기 전 해 미국이 독립(1776년)을 선언했고, 프랑스혁명(1789년), 나폴레옹의 몰락(1815년) 등 역사의 물줄기가 크게 바뀌는 일들이 많았다. 가우스 시대에 이뤄진 수학에서의 혁명적 시도도 그러한 시대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다.(책 ‘아무도 풀지 못한 문제’)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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